Published on March 8, 2014
Published on March 8, 2014 

예술가로서의 고려가 주거의 곳곳에 살아있습니다.

조양의 방
조소관 중에서도 가장 격식 있는 방이 조양의 방입니다. 목재 부분에는 광을 낸 통나무가 사용되고 벽에는 잘게 부순 마노를 입혔으며, 천장에는 뒤에 삼나무 껍질을 덧댄 ‘진다이스기’(오랫동안 물이나 땅속에 묻혀 있던 삼목재)가 사용되었습니다. 해를 거치면서 까지거나 색이 바랜 벽면은 이번 개수공사를 통해 마노만을 벗겨 내 세척 후 다시 입혀졌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원래의 마노를 따라 복원되어 창건 당시의 빛을 아름답게 되찾았습니다.


아사쿠라 후미오 (1883-1964)
아사쿠라 후미오는 1883년 오이타 현에서 11명의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10살에 아사쿠라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902년에 조각가로 활약하고 있던 친형인 와타나베 오사오를 따라 상경한 후 동경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하고, 재학 당시 해군성 공모에 「니레 카게노리 중장 상」으로 1등을 받아, 신진 조각가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연구과로 진학하면서 텐노지쵸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후진 양성에 임했습니다. 1910년에 「하카모리」를 발표하고 제10회 문전에서는 약간 34세의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발탁되어, 조각가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상」 「다키 렌타로상」 「후타바야마세키」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사진은 도록 「아사쿠라 조소관」에서 발췌)

 아틀리에의 정원에 접한 창문은 통나무 기둥에 철제 유리문이 끼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틀리에 현관의 아랫부분에는 속새나무가 사용되고, 계단의 난간과 기둥에는 광낸 통나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물의 외관은 콘크리트 3층 건물이고 외벽은 검은 칠이지만 실내는 나뭇결이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아사쿠라 스스로 시멘트로 지은 건물 안이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고 밝힌 것처럼, 아틀리에에 설치된 승강기를 위해 콘크리트로 지어진 외관을 보완하듯이 목재나 대나무로 실내를 따뜻하게 연출했습니다. 이러한 세심한 의도는 실내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틀리에동 현관 윗부분에는 대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격자가, 현관 왼쪽 바닥에는 벽 곡면에 맞게 구부려진 대나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홀 요벽에도 대나무가 깔리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휘어진 통나무가, 계단의 수직면에는 대나무가 대여 있습니다. 이러한 대나무와 통나무 마감은 조소관 실내 곳곳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아사쿠라 조소관은 준공 70여 년을 거치면서 노후화가 심해져서 2007년에 실행된 내진 조사에서 목조 부분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또한, 준공 후 몇 차례의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그 방식도 아사쿠라의 의향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사쿠라 후미오의 만년기인 1960년대 초반의 건축과 정원이 최종형으로 간주하므로 이번 보수공사에서는 노후 부분을 수리하고 내진 보강, 그리고 문화재로서의 가치 향상을 위해 창건 당시의 아사쿠라 후미오의 의도를 반영한 1960년대 초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아틀리에
정원에 접한 창문에는 철제 창틀이 사용되고 있는데, 창틀을 사이에 끼듯이 세워진 나무 기둥이 마루와 벽과 함께 실내에 부드러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아틀리에의 벽면이나 칸막이 모서리에 곡선이 사용된 이유는, 조각을 바라볼 때 불필요한 세로 선이 배경에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틀리에는 남북의 창문과 안뜰에 접한 창문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재
실내의 삼면에는 서가가 설치되어 많은 장서가 꽂혀있습니다. 서재에는 창건 당시의 조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대체되었던 아틀리에의 조명도 이와 같은 형태로 복원되었습니다.
 

소심의 방
소심이란 거짓 없는 마음, 꾸미지 않는 마음을 뜻합니다. 섬세하게 디자인된 방 중에서도, 초심의 방은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아사쿠라 후미오 (1883-1964)
아사쿠라 후미오는 1883년 오이타 현에서 11명의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10살에 아사쿠라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902년에 조각가로 활약하고 있던 친형인 와타나베 오사오를 따라 상경한 후 동경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하고, 재학 당시 해군성 공모에 「니레 카게노리 중장 상」으로 1등을 받아, 신진 조각가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연구과로 진학하면서 텐노지쵸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후진 양성에 임했습니다. 1910년에 「하카모리」를 발표하고 제10회 문전에서는 약간 34세의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발탁되어, 조각가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상」 「다키 렌타로상」 「후타바야마세키」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사진은 도록 「아사쿠라 조소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