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January 1, 2017
Published on January 1, 2017

프랑스 유학 시절의 노력은 일본에서 결실을 이루어갑니다.


구로다 기념관 기념실 (2016년 7월 취재 때의 전시 풍경, 전시가 변경됩니다.)
기념실에는 세이키의 파리 유학, 귀국 후의 작품과 자료가 그의 생애와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애용하던 실내용 이젤, 의자와 화구함 

기념실의 천창은 세밀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구로다 세이키가 유학한 당시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마네 (1832-1883), 클로드 모네 (1840-1926), 에드가 드가 (1834-1917)의 인상파 등이 새로운 예술 운동으로서 대두하면서 예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포니즘으로서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한 세이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야학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라파엘 코란의 화실에서 배우던 세이키는 결국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된 메이지 22년(1889)에 그림에 전념할 것을 결심합니다. 당시의 프랑스가 문화 국가로서 대두하는 것을 거울삼아 세이키는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그려봤을 것입니다.

 빛이 넘치는 야외에서 밝은 여성이나 나체를 모티브로 한 코란의 표현은 그때까지 일본에서 비하되던 우키요에의 춘화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표현이었습니다. 나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세이키 자신도 이 주제에 도전하는 것을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기념실의 문틀에 화려한 장식이 보입니다.

구로다 기념관의 기념실의 명판에는 ‘구로다 자작 기념실’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관이 설립된 당시에는 천장에 설치된 창문을 통해 세이키의 작품과 같이 자연광이 들어왔지만, 개수 이후에 작품 보호를 위해 조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구로다 기념관의 기념실의 명판에는 ‘구로다 자작 기념실’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관이 설립된 당시에는 천장에 설치된 창문을 통해 세이키의 작품과 같이 자연광이 들어왔지만, 개수 이후에 작품 보호를 위해 조명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