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December 6, 2019
Published on December 6, 2019

근대 문학의 흐름은 오가이와 함께했습니다.


모리 오가이 구옥 · 오가이소(스이게츠 호텔)

모리 오가이(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다이쇼 5년(1961), 조각가 다케이시 코자부로의 작업실에서 촬영
 
모리 오가이(모리 린타로, 1862-1922)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문호입니다. 의사 가문에 태어나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소설과 번역, 연극이나 평론 등의 분야에서 왕성한 문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의 영향이 문단을 석권하고 새로운 문학이 모색되는 가운데,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가이는 서양적 가치관에 대한 식견을 일찍이 문학에 담았습니다. 메이지 20년대(1887년대)는 당시 활약이 두드러졌던 오자키 고요, 코다 로한, 츠보우치 쇼요 등의 이름을 따 고로쇼오의 시대라 불렸으며, 오가이는 근대 문학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모리 오가이의 본명은 모리 린타로라 하며 에도에서 메이지로 시대가 격변하는 에도 시대 말기인 분큐 2년(1862)에 시마네현 츠와노쵸에서 번의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7세에 번의 학교인 요로칸에 들어간 오가이는 이윽고 영주인 가메이 가문의 의향으로 아버지와 함께 10세에 도쿄로 상경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11세에 오가이는 도쿄 대학 의학부 예과에 입학하지만, 당시 입학은 13세부터 가능했기 때문에 나이를 속이고 입학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오가이는 학자가 되고자 국비 독일 유학을 목표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졸업 시험 때 몸 상태가 안 좋은 등, 불운으로 국비 유학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주변의 권유로 오가이는 육군 군의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가이의 친필 강의 노트(복제 ·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의대생 시절의 강의록이 오가이의 친필로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동물학, 식물학, 병리학 등 여러 교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졸업 시험 종료 기념 (좌측 두 번째)
메이지 14년(1881) 촬영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군의관으로서 연구에 몰두하는 가운데 오가이는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 위생 제도를 조사하여 「의학전서고본」으로 정리했습니다. 그 공적을 평가받아 오가이는 메이지 17년(1884)에 관비 유학생으로서 위생학의 조사와 연구를 위해 독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 등 각지를 방문했습니다. 4년간의 유학 일상은 「독일 일기」로 저술되었고, 연구에 힘쓰는 한편, 교제와 문화, 예술을 즐기는 청춘 시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가이의 생일에 독일에서 사사한 로트 군의가 선물한 잔(복제 ·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메이지 21년(1888)에 귀국, 이듬해인 22년(1889)에 번역집 「오모카게」를 발표하고 문예지 「메사마시구사」의 전신이 된 「시가라미조시」를 창간, 그리고 첫 소설 작품이 된 「마이히메」를 오가이소(현 스이게츠 호텔)에서 집필하면서 군의관과 문필가를 오가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유학은 오가이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독일 3부작이라 불리는 초기 작품인 「마이히메」, 「우타카타노키」, 「후미츠가이」는 오가이가 머물던 베를린, 뮌헨, 그리고 드레스덴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유학 체험을 짙게 반영한 창작 소설은 우아한 아문체와 함께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독일 3부작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좌측 「마이히메」 (「고쿠민노토모」69호), 중앙 「우타카타노키」(「시가라미소시」11호), 우측「후미츠가이」(「신쵸햐쿠슈」12호)

 사생활에서는 메이지 22년(1889)에 해군 중장 남작 아카마츠의 장녀인 토시코와 결혼하고 이듬해에는 자식도 얻었지만, 부득이하게 바로 이혼하고 오가이소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일 전쟁(1894-1895)이 시작되면서 오가이는 군의관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메이지 28년(1895)에 귀국, 이듬해인 29년(1896)에 바로 문예지 「메사마시구사」를 창간합니다. 창간호에는 당시 이름을 떨치던 고다 로한, 오자키 고요, 사이토 료쿠우 등이 기고하면서 큰 평판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32년(1899)에 오가이가 기타큐슈시 고쿠라로 부임하게 되면서 문학 활동도 제한되고, 이윽고 「메사마시구사」도 종간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부득이 문학의 중심이던 도쿄를 떠나게 되면서 비록 독일 3부작 이후에 창작은 없었지만, 열심히 번역과 평론을 하면서 다시 안데르센의 작품인 「즉흥시인」을 번역하고 간행했습니다.
 메이지 35년(1902)에는 아라키 시게와 재혼하고 귀경하지만, 그 2년 후인 메이지 37년(1904)에는 러일 전쟁(1904-1905)이 시작되면서 오가이는 다시 전쟁터로 향하게 됩니다. 군의의 임무로 바쁘게 지내면서도 단가와 하이쿠를 써서 안부를 대신해 가족과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이들 글은 나중에 다카하마 쿄시, 사사키 노부츠나 등의 협력으로 「우타닛키」로 편찬되었습니다.

안데르센 저, 오가이 번역 「즉흥시인」상권, 하권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시가집 「우타닛키」(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우타닛키」에 담긴 시는 처 시게가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읊어진 것도 많다고 합니다. 

 메이지 39년(1906)에 귀국한 오가이는 다시 문단에 복귀하지만, 고요, 료쿠우, 그리고 「메사마시구사」를 통해 교류가 있던 마사오카 시키도 이미 타계한 후였습니다. 시마자키 토손, 다야마 카타이 등의 자연주의 문학이 대두하는 가운데, 이시카와 타쿠보쿠, 기노시타 모쿠타로, 요시이 이사무 등은 오가이를 스승으로 삼아 잡지 「스바루」를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를 통해 오가이는 「위타 · 섹스아리스」(메이지 42년(1909)), 「세이넨」(메이지 43년(1910)), 「카모」(메이지 44년(1911)) 등 잇따라 대표작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오가이는 서양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타카타노키」는 독일 유학시기에 지기가 된 서양화가 하라다 나오지로를 모델로 하였으며, 오가이 자신이 그곳에서 예술에도 가까이 지냈을 것이라 여겨지는 묘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가이는 독일 유학에서 귀국 후 메이지 24년(1891)에는 그 당시 도쿄 미술 학교 교장이었던 오카쿠라 텐신의 초빙으로 미술 해부학 강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메사마시구사」에는 오가이의 미술 비평과 심미학에 대한 초역이 자주 게재되었지만, 소설에도 서양 회화에 대한 묘사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세이넨」에서는 소녀의 용모를 에두아르 마네의 「나나」에 비유하고, 당시에는 드물었던 우에노 세이요켄 앞에 주차된 자동차를 보고,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 서부 철도」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깊은 조예 때문인지, 메이지 40년(1907)에 개최된 제1회 문전(문부성 미술 전람회)에서 서양화 부문의 심사 위원으로 활동하고 만년 다이쇼 8년(1919)에는 제국 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40년대 후반에는 「아베 이치조쿠」, 「산쇼다유」와 같은 역사 소설이나 역사물도 발표했습니다. 이후 다이쇼 5년(1916)에는 35년간 몸담았던 육군을 사임하고 이듬해인 6년 (1917)에 제실 박물관 (현 도쿄 국립 박물관) 총장 겸 도서 책임자로 취임했습니다. 다이쇼 11년(1922), 향년 60세의 나이로 서거하기 직전까지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메사마시구사」제1권(분쿄구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모리 오가이가 주재한 문예지. 1권의 표지는 독일 유학 시절에 교류한 화가 하라다 나오지로가 그렸습니다. 고다 로한, 오자키 고요, 사이토 료쿠우 등의 저명한 문학가가 다수 기고하고 오가이, 료쿠우, 로한의 「산닌죠고」(후에 「운중어」로 개제)는 문학 평론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표지 그림은 하라다 나오지로 외에 나카무라 후세츠와 구로다 세이키도 담당했습니다.
 

「스바루」1호 (분쿄구립 오가이 기념관 소장)
요사노 텟칸이 창립한 도쿄 신시샤를 탈퇴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심미신설」(분쿄구립 오가이 기념관 소장)
독일 철학자인 요하네스 폴켈트가 저술한 심미적 시사 문제의 개요를 기술한 서
 

모리 린타로 묘(젠린지)

「가코 츠루도 필기 유언서」(복제 · 분쿄구립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오가이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작성된 유언장은 이미 붓을 쥘 힘조차 없어진 오가이를 대신해 친구인 가코 츠루도가 대필했습니다. 오가이는 군의관, 문필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지만 ‘나는 이와미(시마네현 서부 지방의 옛 명칭)사람 모리 린타로로서 죽길 원한다’라며 ‘묘에는 모리 린타로의 무덤 외에 다른 글을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묘소인 젠린지(도쿄도 미타카시), 그리고 분골 된 고향의 츠와노(시마네현 츠와노쵸)의 요메이지의 묘비에는 친구였던 나카무라 후세츠가 휘호한 '모리 린타의 묘'의 글만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다이쇼 5년(1961), 조각가 다케이시 코자부로의 작업실에서 촬영
 
모리 오가이(모리 린타로, 1862-1922)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문호입니다. 의사 가문에 태어나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소설과 번역, 연극이나 평론 등의 분야에서 왕성한 문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의 영향이 문단을 석권하고 새로운 문학이 모색되는 가운데,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가이는 서양적 가치관에 대한 식견을 일찍이 문학에 담았습니다. 메이지 20년대(1887년대)는 당시 활약이 두드러졌던 오자키 고요, 코다 로한, 츠보우치 쇼요 등의 이름을 따 고로쇼오의 시대라 불렸으며, 오가이는 근대 문학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메사마시구사」제1권(분쿄구 모리 오가이 기념관 소장)
모리 오가이가 주재한 문예지. 1권의 표지는 독일 유학 시절에 교류한 화가 하라다 나오지로가 그렸습니다. 고다 로한, 오자키 고요, 사이토 료쿠우 등의 저명한 문학가가 다수 기고하고 오가이, 료쿠우, 로한의 「산닌죠고」(후에 「운중어」로 개제)는 문학 평론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표지 그림은 하라다 나오지로 외에 나카무라 후세츠와 구로다 세이키도 담당했습니다.
 


「스바루」1호 (분쿄구립 오가이 기념관 소장)
요사노 텟칸이 창립한 도쿄 신시샤를 탈퇴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심미신설」(분쿄구립 오가이 기념관 소장)
독일 철학자인 요하네스 폴켈트가 저술한 심미적 시사 문제의 개요를 기술한 서
 
 
 
 
 
 
 
 
 
 
 
 
 

모리 린타로 묘(젠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