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August 7, 2017
Published on August 7, 2017

이바라키현 이즈라의 이 땅에서 새로운 예술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바라키현 이즈라(현 기타이바라키시 이즈라)에서 태평양을 향한 거친 풍경은 텐신 등이 간직한 새로운 소망을 방불케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적막감을 느끼게 합니다. 오른쪽에 육각당(간란테이, 이바라키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 내)이 보입니다. 젊은 날에 취재로 방문했던 호류사 몽전과 쵸호사 육각당이 상기됩니다. 헤세이 23년(2011)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로 손실되었지만, 헤세이 24년(2012)에 지원을 통해 재건되었습니다.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의 정원에는 텐신의 「아세아와히토츠나리(아시아는 하나이다)」 ‘Asia is one’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서를 공부하고 또한 서구의 지식에 정통한 텐신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텐신을 평생 존경한 요코야마 다이칸이 글을 쓰고 일본 미술원 회원인 신카이 타케조가 텐신의 옆모습을 조각했습니다.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 홈페이지
 
일본 미술원 홈페이지

 텐신은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한서를 공부하고 이후 어학당에서 영어를 습득했습니다. 도쿄 카이세이소 (현 도쿄대학)에 입소하여 어네스트 페노로사를 만나 메이지 14년(1881)에는 조수로서 일본과 동양 미술품 수집에 임했으며, 메이지 19년(1886)에는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설립을 위해 페노로사 등과 함께 구미 각지를 시찰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텐신은 동양과 서양의 피아의 차이를 실감하고 일본과 동양미술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텐신의 아버지 오카쿠라 칸에몬과 어머니인 코노(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아버지인 칸에몬은 원래 후쿠이 번사로서 에도에 근무한 후, 후쿠이번의 요코하마 상점 ‘이시카와야’의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인 코노는 장남 미나토이치로(1860-1875), 차남 텐신, 삼남 겐자부로(요절), 넷째 요시사부로, 장녀 쵸코를 얻었지만 장녀를 출산하면서 급서 했습니다.
 

 메이지 23년(1890)에 설립된 동경 미술학교는 메이지 19년(1886)부터 20년(1887)에 걸쳐 페노로사와 함께 수행한 서양 미술교육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공부대학교(현 도쿄대학 공학부)의 공부미술부와의 통합으로 도쿄 미술학교가 설립된 경위로 교장 사무취급(초대 교장 대리)에는 하마오 아라타가 취임했지만, 제 2대 교장이 된 텐신이 사실상 초대 교장이었습니다. 텐신은 동경 미술학교에서 동양미술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메이지 31년(1898)에 있었던 도쿄 미술학교 소동으로 교장을 사임함과 동시에 제국 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 미술부장도 사임했습니다. 텐신의 사임과 더불어 동경 미술학교의 서양화과를 제외한 교원은 총사퇴를 결의했지만, 새로운 교장의 만류도 있어 결과적으로는 하시모토 가호, 롯카쿠 시스이, 요코야마 다이칸, 시모무라 칸잔, 데라사키 코교, 고보리 토모토, 히시다 슌소, 사이고 코게츠 등이 텐신과 함께 사직하게 됩니다.
 

도쿄 미술학교 교장 시절의 텐신(메이지 28-29년경(1895-96), 이바라키현 텐신 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메이지 31년(1898), 텐신은 사임한 교원들과 함께 일본 미술원을 시타야구 야나카(현 다이토구 야나카)의 텐신 저택의 터에 병설했습니다. 텐신은 인도와 보스턴 미술관의 중국/일본 미술부의 업무로 활동을 넓혀갔지만, 일본 미술원의 경영난 등으로 인해 메이지 39년(1906)에 일본 미술원 제1부(회화)를동양의 바르비종으로 간주한 이바라키현 이즈라로 옮김과 동시에 자신의 주거도 옮겼습니다. 이즈라에서의 생활은 어려워 몇 년 만에 생활도 궁핍해지고 일본 미술원은 점차 그 활동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히시다 슌소는 안과 질환의 치료를 위해 일년 반 만에 이즈라를 떠나고 이어서 다이칸도 도쿄로 거점을 옮겼습니다. 한편, 텐신은 메이지 40년(1907)에 문전(문부성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취임하고 메이지 43년(1910)에는 보스턴 미술관 중국/일본 미술부장으로 취임, 메이지 45년(1912)에 문전 심사위원으로 취임했지만, 그 이듬해 다이쇼 2년(1913)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0세에 코마고메의 소메이 묘원에 묻혔지만 이즈라에도 분골 되었습니다. 비문과 함께 영시 ‘An Injunction’(계고)에 담긴 유지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텐신은 에도 막부 말기의 격동기부터 메이지 시대를 빠르게 앞서 나간 희대의 국제인이며, 일본 미술에 대한 독실한 비호자 중의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텐신의 사후, 다이칸 및 칸잔의 노력으로 일본 미술원은 다이쇼 3년(1914)에 야나카 미사키 사카 미나미쵸(현 야나카 욘쵸메)에 재건되었습니다. 현재 매년 개최되는 봄의 원전과 가을의 재흥 원전은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즈라의 수평선으로 솟는 일출은 텐신 등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텐신의 고택은 메이지 37년(1904)에 텐신이 설계하고 히라카타의 동량인 오구라 겐조가 축조했습니다. 텐신이 이즈라로 이주하기 전에는 전복 요리점인 ‘간포로’가 있었고, 이 건물의 목재를 일부 사용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원래의 건물은 62평(약 205 평방미터)였지만, 메이지 38년(1905)에 확장되었습니다. 현재는 저택의 서쪽에 있던 텐신의 서재와 동쪽의 욕실은 철거되었습니다.

 

 

‘간란테이’라고도 불리는 이즈라 육각당은 불당, 다실을 겸한 정자입니다. 태평양의 거친 바다를 향해 호젓이 세워져, 텐신이 독서와 사색에 잠긴 모습이 연상됩니다.
 
 

헤세이 23년(2011) 동일본 대지진의 쓰나미는 저택의 바닥까지 침수시켜 육각당을 비롯해 많은 것이 손실되었습니다.
 
 
이즈라의 푸르름 속에 텐신이 잠들어 있습니다. 곁에는 평생 텐신을 따르던 히라구시 덴츄가 손수 심은 동백이 묘소를 지키듯이 서있습니다.
 
  
텐신의 부인 모토코, 장녀 코마코(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코마코가 사는 구마모토를 방문한 텐신과 모토코(메이지 45년(1912) 6월, 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텐신의 동생 오카쿠라 요시사부로(1868-1936)는 제국 대학(현 도쿄대학) 문화대학선과에 진학하여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연구사의 「영문학총서」 등의 주간을 맡았으며, 연구사 「신영일대사전」 등을 편찬했습니다. 좋은 이해자로서 텐신을 지원했습니다. (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모토코에게 보낸 바이칼 호반의 엽서(메이지 41년(1908) 6월 24일, 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보스턴 미술관 근무 후, 런던, 파리 등의 박물관 시찰 후 시베리아 철도의 귀로에서 보냈습니다.
 
 
텐신의 묘소 언덕에는 텐신의 딸인 요네야마 코마코의 무덤이 조용하게 있습니다. 남편인 요네야마 토키오는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철도성(구 국철)에서 철도 국장을 역임하면서 전근이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코마코는 프랑스어에도 능한 풍부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쇼와 20년(1945)에 이즈라로 이주했지만 토키오는 같은 해에 사망하고 이후에 코마코는 쇼와 30년(1955)까지의 십 년간, 텐신교소에 살면서 텐신의 묘소를 지켰습니다. 향년 72세였습니다.
 

텐신의 고택 근처에는 텐신과 함께 이즈라로 이주한 히시다 슌소의 집터가 남아있습니다. 도쿄 미술학교에서 하시모토 가호 등에게 사사하고 다이칸과 함께 기존의 선묘 표현에서 벗어난 몽롱체에 대한 시도와 서양적인 공기 원근법을 이용한 대표작인 「낙엽」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긴 슌소는 36세에 요절했습니다.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의 정원에는 텐신의 「아세아와히토츠나리(아시아는 하나이다)」 ‘Asia is one’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서를 공부하고 또한 서구의 지식에 정통한 텐신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텐신을 평생 존경한 요코야마 다이칸이 글을 쓰고 일본 미술원 회원인 신카이 타케조가 텐신의 옆모습을 조각했습니다.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 홈페이지
 

일본 미술원

일본 미술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