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구시 덴츄 작 「오카쿠라 텐신 상」
미술학부의 중앙에는 일본 근대 조각의 거장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구라 텐신 상」이 있습니다. 텐신을 경애하던 다나카는 등교할 때마다 자신이 제작한 텐신상에 경례를 했습니다.
동경예술대학
구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 사생교실의 수업풍경
동경예술대학은 1949년 국립대학설치법에 따라 동경미술학교(현 미술학부)와 동경음악학교(현 음악학부)를 통합하여 2 학부 10학과로 설치되었습니다. 현재는 새로운 학과를 포함하여 2학부 14학과와 미술, 음악, 영상대학원 3 연구과로 구성되어 캠퍼스도 다이토구 우에노 공원, 이바라키현 토리데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아다치구 센쥬 등으로 그 규모를 확대하고, 국내 유일의 국립종합예술대학으로 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경미술학교의 역사는 1885년 문부성에 도화취조괘가 설치되어, 어니스트 페놀로사, 오카쿠라 텐신 카노 호가이 등이 관립미술학교의 설립 준비를 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1887년에 ‘동경미술학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1888년에 현재의 우에노 공원의 구 교육박물관 터로 이전했습니다. 1889년 2월, 일본 미술의 진흥을 취지로 5년제 학교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회화(일본화), 조각(목조), 미술공예(금속공예, 칠공예)의 3가지 전공이었으나 주조과나 서양화과 등이 신설되고 여러 차례의 제도 개혁을 거쳐 동경예술대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단에 계속)
동경미술학교 초대 교장 하마오 아라타
문부성 전문학무국장 겸 교장사무취급으로 1887년부터 1890년까지 역임했습니다.
제2대 교장 오카쿠라 카쿠조(텐신)
간부와 교장대행을 거쳐 제2대 교장으로 1890-1898년에 근무하였습니다. 1898년, ‘미술학교 소동’으로 사임. 텐신과 함께 하시모토 가호 등도 사직서를 제출하고, 재야 단체인 ‘일본미술원’(현 일본미술원)을 설립했습니다.
오카쿠라 텐신(1863-1913)은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동경 카이세이학교 (현 동경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당시 강사였던 어니스트 페놀로사의 미술이론에 큰 영향을 받아 문부속을 거쳐 페놀로사와 함께 구미 미술시찰에 파견되고 1890년에 동경미술학교 초대교장인 하마오 아라타의 뒤를 이어 제2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페놀로사를 비롯해 구로카와 마요리, 하시모토 가호, 다카무라 코운, 가와바타 교쿠쇼, 코세 쇼세키, 카노우 나츠오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실질적인 학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후 서양화과, 도안과에는 구로다 세이키, 후지시마 타케지, 와다 에이사쿠, 오카다 사부로스케 등이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텐신은 1898년에 학교를 떠나 하시모토 가호, 요코야마 다이칸, 시모무라 칸잔, 히시다 슌소 등과 일본미술원을 결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당시 일본이 동양 전통에 대한 당착과 서양의 새로운 흐름 간에 갈등을 겪던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미술학부 캠퍼스에 오카쿠라를 기념하여 설치된 육각당에는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쿠라 텐신 상」이 놓여 있습니다. (하단에 계속)
전통부흥 이념인 고대 관복의 켓테키(일본 옛 무관의 정장, 옷의 양쪽 겨드랑이를 꿰매지 않고 터놓은 의복), 오리에보시(옛날에 귀족이나 무사가 쓰던 건) 차림의 교관들. 왼쪽부터 카노우 나츠오, 다카무라 코운, 구로카와 마요리, 오카쿠라 텐신, 하시모토 가호.
초창기 동경미술학교 (메이지 30년대 초반)
당시의 학교 본관은 전신인 구 동경교육박물관이었습니다.
누마타 카즈마사 작 「마사키 나오히코 상」
마사키 기념관은 동경미술학교 교장이던 마사키 나오히코의 오랜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35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상은 안마당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진열관
마사키 기념관 옆에는 친레츠관이 있습니다. 친레츠관은 1929년에 오카다 신이치로가 설계하였으며 오랫동안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1층은 조각 등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도록 측면에서 자연광이 들어오고, 2층은 높은 창에서 빛이 들어와 회화 등의 평면 작품 전시에 적합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5대 교장으로 부임한 마사키 나오히코(1862-1940)는, 1932년까지 30여 년을 재직하면서 제국미술원 원장, 각 박람회 심사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마사키 나오히코는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본미술원과 화해를 하여, 서양파와 균형을 취하면서 텐신의 전통부흥 의사도 이어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마사키 교장은 일본미술, 서양미술도 동등하게 존중하는 방침을 기반으로 정비에 노력하여 동경미술학교의 존재를 확고히 했습니다. 우에노 학교터에는 재직 시 수집한 작품을 소장 전시하는 친레츠관이 현존하고, 1935년에 교장의 오랜 공로를 기념하여 설립된 마사키 기념관이 남아 있습니다. 마사키 기념관은 순일본양식을 본뜬 철근 콘크리트건물로서 방에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다키노가와 별장 서원을 위해 제작 기증한 하시모토 가호의 후스마에(널문에 그린 그림), 국화구락부(미술계의 사교모임)에서 기증받은 다카무라 코운의 투조 란마(천장과 윗미닫이틀 사이에 통풍·채광을 위해 교창을 낸 부분) 등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애마 와카구사호를 탄 오카쿠라 카쿠조(텐신)
미술학교 소동
오카쿠라 텐신이 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29세에서 37세까지의 장년기로서 하시모토 가호나 다른 교관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교장 직무 외에 미술사, 미학, 학내외의 박람회 기획부터 제국박물관의 이사 겸 미술부장 등의 요직도 맡을 정도로 열정이 있었습니다. 1893년 무렵에 교원 25명, 학생 수 214명 정도로 소규모였던 동경미술학교를 확장하기 위해, 제국 의회에 서양화, 서양조각 부문 증설을 포함한 조직과 예산 확장을 위한 ‘미술교육시설에 대한 의견’(미술학교 확장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이 안은 1895에 가결되었지만, 텐신의 의도와는 달리 일본미술과 서양 미술을 동시에 장려하는 수정안이었습니다. 본 법안은 당시 문부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의 의향으로 여겨지며, 법안 통과 후 바로 서양화과 설치가 결정되고 사이 온지와 가까운 사이인 구로다 세이키, 쿠메 케이이치로 등이 교수로 선정되고, 이듬해인 1896년에 과가 출범했습니다. 구로다 등의 양화 신파는 본 수정안을 방패 삼아 미술학교 개혁에 관한 의견서를 들이대며 교장인 텐신과 대립했습니다. 1897년에는 신문에도 텐신에 대한 비판 논설이 게재되고 배척 기운은 높아갔습니다. 또한 이듬해 1898년에는 제국박물관 총장인 구키 류이치도 텐신 배척의 의향을 표방했기 때문에 텐신은 이사 겸 미술부장을 사임하고 후에는 교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가호 이하 33명의 교관도 함께 사표를 제출했지만, 텐신은 만류했습니다. 사표를 제출한 강사의 대부분은 텐신과 가호를 중심으로 재야단체인 일본미술원을 설립했습니다. (동경예대 홍보지 ‘예대통신 11호’ 발췌)
마사키 기념관
가나자와 요우지(당시 건축과 조교수)가 설계한 이 기념관은 인접한 친레츠관과 함께 동경미술학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경관을 보여줍니다.
히라구시 덴츄 작 「오카쿠라 텐신 상」
미술학부의 중앙에는 일본 근대 조각의 거장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구라 텐신 상」이 있습니다. 텐신을 경애하던 다나카는 등교할 때마다 자신이 제작한 텐신상에 경례를 했습니다.
동경예술대학
애마 와카구사호를 탄 오카쿠라 카쿠조(텐신)
미술학교 소동
오카쿠라 텐신이 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29세에서 37세까지의 장년기로서 하시모토 가호나 다른 교관보다 훨씬 어렸습니다. 교장 직무 외에 미술사, 미학, 학내외의 박람회 기획부터 제국박물관의 이사 겸 미술부장 등의 요직도 맡을 정도로 열정이 있었습니다. 1893년 무렵에 교원 25명, 학생 수 214명 정도로 소규모였던 동경미술학교를 확장하기 위해, 제국 의회에 서양화, 서양조각 부문 증설을 포함한 조직과 예산 확장을 위한 ‘미술교육시설에 대한 의견’(미술학교 확장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이 안은 1895에 가결되었지만, 텐신의 의도와는 달리 일본미술과 서양 미술을 동시에 장려하는 수정안이었습니다. 본 법안은 당시 문부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의 의향으로 여겨지며, 법안 통과 후 바로 서양화과 설치가 결정되고 사이 온지와 가까운 사이인 구로다 세이키, 쿠메 케이이치로 등이 교수로 선정되고, 이듬해인 1896년에 과가 출범했습니다. 구로다 등의 양화 신파는 본 수정안을 방패 삼아 미술학교 개혁에 관한 의견서를 들이대며 교장인 텐신과 대립했습니다. 1897년에는 신문에도 텐신에 대한 비판 논설이 게재되고 배척 기운은 높아갔습니다. 또한 이듬해 1898년에는 제국박물관 총장인 구키 류이치도 텐신 배척의 의향을 표방했기 때문에 텐신은 이사 겸 미술부장을 사임하고 후에는 교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가호 이하 33명의 교관도 함께 사표를 제출했지만, 텐신은 만류했습니다. 사표를 제출한 강사의 대부분은 텐신과 가호를 중심으로 재야단체인 일본미술원을 설립했습니다. (동경예대 홍보지 ‘예대통신 11호’ 발췌)
마사키 기념관
가나자와 요우지(당시 건축과 조교수)가 설계한 이 기념관은 인접한 친레츠관과 함께 동경미술학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경관을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