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와 슈지 흉상
동경음악학교 설립에 힘쓰고 초대 교장이 된 이자와 슈지의 흉상은 현재 소가쿠도 옆에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30년에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교장이던 노리스기 요시히사의 제안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이 장소가 아닌 동경음악학교 정문을 바로 들어선 곳에 건물을 마주 보고 세워져 있었으며, 등교할 때 흉상에 인사하고 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가 우거진 음악학부 캠퍼스
음악학부의 전신인 동경음악학교는 1879년 10월 일본의 음악교육을 시행함에 앞서 제반사항을 조사하기 위해 문부성에 음악 취조괘가 설치되었고 담당으로서 초대 동경음악학교 교장이 된 이자와 슈지가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 1880년 3월, 혼고의 문부성 국유지에 취조관청을 두고 국내외 음악에 대한 조사를 비롯한 많은 사업을 시작하고, 동경사범 및 동경여자사범 부속초등학교, 유치원생들에게 수업을 시행함과 동시에 취조괘도 전습인을 모집하여 음악수업과 교원양성을 시작했습니다. 1882년 9월 이후에는 외국의 음악학교제도를 조사한 후 4년제 음악전문교육의 학제를 시행하면서 취조괘는 단순한 음악연구시설만이 아닌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음악교육기관으로서 성장하였습니다. 음악취조괘는 그 후 1885년 2월에는 음악 취조처, 12월에는 음악 취조괘가 되었고, 1887년 10월에 동경음악학교로 개칭하고 1890년 5월에 현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1893년에는 잠시 동경고등사범학교의 부속학교가 되었지만, 1899 4월에 다시 독립하여, 1936년 6월 일본음악과가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의 제도개혁을 거쳐 1952년 3월, 동경예술대학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동경음악학교 초창기에는 4년제 본과 [성악과, 기악과(피아노/오르간/현악기/관악기/타악기), 작곡과 및 일본음악과 (노가쿠/소쿄쿠/나가우타), 4년제 사범과, 2년제 연구과 (성악부/기악부/작곡부/일본음악부) 및 간소한 기능교육을 목적으로 한 선과(1-5년 이내)로 구성된 전문학교였습니다.
동경음악학교의 역사에 관해서는 ‘역사 산책/구동경음악학교 소가쿠도를 찾아서’를 참조하십시오.
수업풍경, 평소의 연습도 진지합니다.
음악학부 3호관
연습홀관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
1887년 10월, 문부성 직할학교로서 동경음악학교가 설치되고, 1890년 5월에 새 교사도 준공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에 같은 해에 열린 제1회 제국의회에서 음악학교 폐지안이 제출된다. 예산절감을 위한 것이다.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의 시작이다. 학교의 존속 자체가 거론된 본교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소가쿠도 준공 후 6개월 뒤인 11월 29일, 제1회 제국의회가 개최되고 음악학교에서는 대대적인 기념연주회가 열렸다. 하지만, 국회가 시작되자 곧 중의원 예산위원회는 예산절감을 위해 고등중학교, 여자사범학교와 함께 동경음악학교의 폐지안을 제출하였다.
동경음악학교의 존폐논쟁은 쿠도 유키모토 의원의 "저는 음악학교의 폐지에 대한 의견을 제출합니다."라는 발언으로 시작되었으며, 교육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사립학교로 가능한 일을 국비로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제국의회에서 제출된 학교폐지안은 각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음악의 효용과 음악학교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이듬해 1월 13일, 의회에는 사정안 폐기에 대한 동의, 폐지 반대의견과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이후에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그동안 이자와 슈지, 코오즈 센자부로 등 학교관계자와 츠지 신지 문부차관 등이 음악학교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논술을 전개했다. 이에 앞서, 중의원은 특별위원 9명을 선출하고 예산안 재심사를 위탁하였으나, 그중 한 명인 아마노 타메유키 의원이 자신을 포함한 특별위원 3명은 학교폐지에 반대한다고 보고하였다. 2월 21일, 각 학교는 아마노 의원의 수정안으로 존속이 결정되고 중의원은 3월 3일에 특별위원회가 제출한 수정안을 가결하였다. 3월이 되어 의원들의 음악학교 참관이 이루어졌고, 이자와 교장은 연주곡목을 스스로 설명하고 창가 편찬사업 등에서의 음악학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창가는 인격을 함양하고 건강에 유익하고 애국신념을 키운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존속결정 후에도 음악학교론은 활발히 발표되었다. ‘더욱 정진하라’ ‘때는 왔다’ ‘창가론’ ‘음악의 필요’ ‘음악은 국가사업이다’ 등의 음악학교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글이 잇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용절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아 동경음악학교는 1893년 9월부터 고등사범학교 부속음악학교가 되어 1899년 4월에 다시 독립 할 때까지 5년 반의 세월을 요하였다. (동경예술대학 홍보지 ‘예대통신 제12호’ 발췌)
이자와 슈지 흉상
동경음악학교 설립에 힘쓰고 초대 교장이 된 이자와 슈지의 흉상은 현재 소가쿠도 옆에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30년에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교장이던 노리스기 요시히사의 제안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이 장소가 아닌 동경음악학교 정문을 바로 들어선 곳에 건물을 마주 보고 세워져 있었으며, 등교할 때 흉상에 인사하고 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
1887년 10월, 문부성 직할학교로서 동경음악학교가 설치되고, 1890년 5월에 새 교사도 준공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에 같은 해에 열린 제1회 제국의회에서 음악학교 폐지안이 제출된다. 예산절감을 위한 것이다.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의 시작이다. 학교의 존속 자체가 거론된 본교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소가쿠도 준공 후 6개월 뒤인 11월 29일, 제1회 제국의회가 개최되고 음악학교에서는 대대적인 기념연주회가 열렸다. 하지만, 국회가 시작되자 곧 중의원 예산위원회는 예산절감을 위해 고등중학교, 여자사범학교와 함께 동경음악학교의 폐지안을 제출하였다.
동경음악학교의 존폐논쟁은 쿠도 유키모토 의원의 "저는 음악학교의 폐지에 대한 의견을 제출합니다."라는 발언으로 시작되었으며, 교육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사립학교로 가능한 일을 국비로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제국의회에서 제출된 학교폐지안은 각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음악의 효용과 음악학교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이듬해 1월 13일, 의회에는 사정안 폐기에 대한 동의, 폐지 반대의견과 수정안이 제출되었고 이후에 동경음악학교 존폐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그동안 이자와 슈지, 코오즈 센자부로 등 학교관계자와 츠지 신지 문부차관 등이 음악학교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논술을 전개했다. 이에 앞서, 중의원은 특별위원 9명을 선출하고 예산안 재심사를 위탁하였으나, 그중 한 명인 아마노 타메유키 의원이 자신을 포함한 특별위원 3명은 학교폐지에 반대한다고 보고하였다. 2월 21일, 각 학교는 아마노 의원의 수정안으로 존속이 결정되고 중의원은 3월 3일에 특별위원회가 제출한 수정안을 가결하였다. 3월이 되어 의원들의 음악학교 참관이 이루어졌고, 이자와 교장은 연주곡목을 스스로 설명하고 창가 편찬사업 등에서의 음악학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창가는 인격을 함양하고 건강에 유익하고 애국신념을 키운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존속결정 후에도 음악학교론은 활발히 발표되었다. ‘더욱 정진하라’ ‘때는 왔다’ ‘창가론’ ‘음악의 필요’ ‘음악은 국가사업이다’ 등의 음악학교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글이 잇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용절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아 동경음악학교는 1893년 9월부터 고등사범학교 부속음악학교가 되어 1899년 4월에 다시 독립 할 때까지 5년 반의 세월을 요하였다. (동경예술대학 홍보지 ‘예대통신 제12호’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