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on January 31, 2009
Published on January 31, 2009

1933년경의 아사쿠사 6구 영화가의 번화한 모습. 가타오카 치에조 등의 배우 이름도 보입니다.

오락의 거리, 아사쿠사의 흥청거림이 들려옵니다.

 에도 시대부터 아사쿠사는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1873년에 센소지 경내는 공원이 되어, 이후 1884년에 6개의 구획으로 나뉘고, 센소지 서쪽의 6구에는 소극장이 많이 이전되었습니다. 이후에 이곳은 곡예, 활동사진, 아사쿠사 오페라 등의 흥행가로 발전했습니다. 6구의 주변에는 후지쥬란죠, 파노라마관, 료운카쿠(12층)등의 오락 시설이 차례차례 세워졌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야시키는 1848-54년에 걸쳐 개원하여, 애초에는 계절의 꽃을 관람하는 시설이었으나, 메이지 시대부터는 다양한 공연과, 동물원도 병설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카페는 서양의 근대 양식으로, ‘모보(모던보이)’와 ‘모가(모던걸)’이 모이는 사교의 장이 되었습니다. 서양식의 시설이 당시의 첨단의 풍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이쇼 시대에 일세를 풍미한 아사쿠사 오페라는 어려운 대사 등이 사용되지 않고, 저렴한 요금으로 즐길 수 있던 대중 오락이었습니다. 많은 극단이 설립되어, 아사쿠사 산유관, 일본관, 관음극장, 금룡관 등에서 상설 공연이 이루어졌습니다. 전시품의 오른쪽에는 쇼와 초기의 ‘카지노 폴리’의 프로그램과 그 주연이었던 에모토 켄이치의 모습이 있습니다.

카페 출입문(재현 전시)이 당시의 활기를 느끼게 해 줍니다. 당시의 카페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여종업원들이 남성객을 접객했기 때문에, 당시 풍조인 ‘에로 그로 난센스(다이쇼 말기, 쇼와 초기의 저속한 풍조를 지칭하는 말)’의 대표격으로 여겨졌습니다. 왠지 오늘날의 상황과도 겹쳐 보이는 듯합니다.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시설이나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당시의 모습을 엽서나 오래된 사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1872년에 신바시-요코하마 간에 철도가 개통되었고, 그 후 1883년에는 동경 북쪽의 현관문으로 우에노역이 개업했습니다. 한편, 서민들에게 더욱 가까운 도시 교통 기관으로 등장한 것은 마차 철도였습니다. 1882년에 개업하여 20년 가까이 활약했습니다. 노선은 그 후에 노면 전철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관동대지진, 그리고 전쟁은 도시에도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관내의 관동대지진이나 전쟁 당시의 기록과 생활상을 전하는 일용품에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후의 눈부신 부흥의 과정도 볼 수 있습니다.

이치무라좌 터
텐보의 개혁 때, 에도 가부키 관허 3좌 중의 하나인 이치무라좌는 니혼바시에서 아사쿠사 사루와카쵸로 이전했습니다. 그 후 1892년에 시타야 니쵸마치로 이전하여, 오노에 키쿠고로 5세나 카와카미 오토지로 등이 출연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다이쇼 시대에는 키쿠고로 6세나 나카무라 키치에몽이 활약했습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그 후에 재건했지만, 1932년에 다시 소실되어 그 긴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치무라좌의 무대막은 왼쪽부터 검은색, 연둣빛, 감색의 3색으로, 현재 국립 극장이 같은 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아사쿠사 6쵸메)

아사쿠사 료운카쿠(12층)는 영국인 기사 William Kinnimond Burton이 설계하여 1890년에 개업했습니다. 높이는 개업 당시 220척(약67미터)라 하였지만, 메이지 말기의 실측에 의해 173척(약 52미터)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일본 제일의 고층 건축물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도 이 료운카쿠였습니다. 아사쿠사의 상징으로 사랑받았지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사진: 다이쇼 시대) 
 

메이지(明治) 말기의 유원지 ‘꽃 저택 Hana-yashiki’. 
 

도쿄시 아사쿠사공원 전도 (1905)
료운카쿠, 파노라마관, 흥행가, 하나야시키, 나카미세 등 당시의 아사쿠사공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마차 철도도 보입니다.

이치무라좌 터
텐보의 개혁 때, 에도 가부키 관허 3좌 중의 하나인 이치무라좌는 니혼바시에서 아사쿠사 사루와카쵸로 이전했습니다. 그 후 1892년에 시타야 니쵸마치로 이전하여, 오노에 키쿠고로 5세나 카와카미 오토지로 등이 출연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다이쇼 시대에는 키쿠고로 6세나 나카무라 키치에몽이 활약했습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그 후에 재건했지만, 1932년에 다시 소실되어 그 긴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치무라좌의 무대막은 왼쪽부터 검은색, 연둣빛, 감색의 3색으로, 현재 국립 극장이 같은 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아사쿠사 6쵸메)
 
 
 
 
 
 
 
 

아사쿠사 료운카쿠(12층)는 영국인 기사 William Kinnimond Burton이 설계하여 1890년에 개업했습니다. 높이는 개업 당시 220척(약67미터)라 하였지만, 메이지 말기의 실측에 의해 173척(약 52미터)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일본 제일의 고층 건축물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도 이 료운카쿠였습니다. 아사쿠사의 상징으로 사랑받았지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사진: 다이쇼 시대) [사진을 클릭하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메이지(明治) 말기의 유원지 ‘꽃 저택 Hana-yashiki’.

 

도쿄시 아사쿠사공원 전도 (1905)
료운카쿠, 파노라마관, 흥행가, 하나야시키, 나카미세 등 당시의 아사쿠사공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마차 철도도 보입니다.